건축가 분석

이타미 준의 제주 건축, 왜 그는 바람을 따라갔을까?

silentko2531 2025. 6. 27. 14:46

1. 바람을 건축한 남자, 이타미 준

제주도의 돌과 바람, 물, 그리고 하늘.
이 풍경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건축으로 번역해낸 건축가가 있다.
그는 일본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삶을 마치고,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받은 세계적인 예술가이자 건축가 – **이타미 준(伊丹潤)**이다.

이타미 준은 2000년대 초반 제주도에 일련의 건축 작업을 남기며,
‘한 건축가가 하나의 섬을 품은’ 드문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의 건축은 제주도에서만 가능한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공간이 감정을 움직이고, 건물이 사유의 매개체가 되는 방식을 탐구했다.

그중에서도 ‘바람’은 그의 제주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이타미 준은 바람을 막지 않았고, 건축으로 바람을 품었다.
그는 제주도라는 땅이 가진 조건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그것과 함께 흐르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타미 준의 건축작품. 제주도에서의 물 박물관 사진

2. 제주라는 장소가 건축가에게 준 질문

이타미 준은 이렇게 말했다:

“건축은 자연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조용히 녹아드는 일이다.”

제주도는 평탄한 땅이 아니다.
화산섬으로 형성된 이 섬은 거친 현무암이 지면을 덮고 있고,
사계절 바람이 거세며, 하늘은 빠르게 흐르고, 습도는 높다.
대부분의 건축가는 이런 조건을 피하거나 제어하려 했다.
하지만 이타미 준은 제주가 가진 자연의 조건을 건축 재료이자 조형 요소로 받아들였다.

그는 질문했다.
“왜 건축은 항상 바람을 막으려 하는가?”
그리고 답했다.
“오히려 바람이 건축을 설계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창을 바람의 방향으로 내고, 벽을 바람의 통로로 설계했다.
건축은 고요하지만, 그 속에는 늘 바람이 흐른다.
바람은 그에게 공기이자 소리이며, 기억이고 감정이었다.

 

3. 이타미 준의 바람의 건축 – 주요 작품들

3-1.  바람의 집 (House of Wind)

‘바람의 집’은 제주 서귀포의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한 건축물로,
이타미 준의 건축 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정육면체의 콘크리트 덩어리 속에, 가늘게 열린 창문과 슬릿, 그리고 천공(穿孔)이 나 있다.
이 구멍들은 모두 바람의 흐름을 읽고 계산한 설계로,
창문을 열지 않아도 바람이 유입되고, 건물 안으로 자연의 숨결이 스며든다.

외부는 무채색 콘크리트로 덮여 있으나, 내부는 빛의 방향과 바람의 방향에 따라
시간마다 분위기가 바뀌는 조용한 명상 공간처럼 작동한다.
이곳에서는 바람이 배경음이자 주인공이 된다.

3-2. 물의 정원 (Water Garden)

물의 정원은 이타미 준이 남긴 ‘바람-돌-물’ 3부작 중 하나로,
수면 위에 떠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특징이다.
물은 고요하지만, 바람이 불면 잔잔한 파문이 일고,
그 파문이 건물의 반사면에 자연의 리듬처럼 흔들리는 건축의 그림자를 만든다.

이 건물은 시각적인 조형미보다, **‘환경 속에서 살아 있는 건축’**을 상징한다.
공간은 고정돼 있지만, 바람과 빛이 움직이며 건물의 표정을 바꾸기 때문이다.

3-3. 돌의 정원 (Stone Garden)

돌의 정원은 제주 화산석이 가진 질감과 무게를 건축적 질서로 정제한 공간이다.
여기서 바람은 더 이상 시끄러운 존재가 아니다.
거칠게 부딪히는 소리조차 돌담과 마찰하며, 일정한 리듬으로 공간에 울린다.
이타미 준은 이처럼 바람을 ‘음악처럼’ 다뤘고,
돌의 틈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을 통해 공간이 호흡하는 방식을 표현했다.

 

4. 바람과 건축의 관계 – 조형이 아닌 감각으로서의 건축

이타미 준은 건축을 ‘물질’이 아니라 ‘경험’으로 이해한 건축가였다.
그에게 바람은 형태가 없지만, 그 느낌은 공간 안에서 완전히 실재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설명하기 어렵고, 사진으로 전달되기 어렵다.
직접 걸어야 하고, 귀 기울여야 하고, 머물러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제주도에서 재료를 말하지 않고, 감각을 디자인했다.
제주도 바람은 한 방향에서만 불지 않고 사계절 다르게 움직인다.
이타미 준은 이를 공간 안에 기억처럼 저장해두었다.
때로는 천장에서, 때로는 벽 사이에서,
때로는 문턱 아래로 바람이 스며들고, 머물고, 흔들렸다.

그의 건축에는 ‘정지된 공기’가 없다.
언제나 흐르고, 흔들리고, 스치고, 지나간다.
그게 바로 바람이 만든 건축이다.


5. 결론 – 우리는 건축을 통해 자연과 대화하고 있는가?

이타미 준의 건축은 말한다.
“건축이 사람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건축과 함께 자연 속에 녹아드는 일이어야 한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몸은 그것을 느낀다.
그 미세한 감각을 건축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이타미 준이 제주에서 한 작업이다.

오늘날 도시의 건축은 너무 자주 자연을 차단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이타미 준은 자연을 차단하지 않고 초대했으며,
그것이 진정한 장소성이고, 인간과 자연의 대화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바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