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로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크게 다가온 건
주인공 라즐로 토스가 결국 공간을 설계한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기록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이라는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민자이자 예술가다.
그가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받은 인상은,
“이곳에 나의 언어를 짓는 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이었다.
건축은 철저히 ‘현실적’인 작업이다.
건축가는 꿈을 꾸지만, 그 꿈은 법과 예산, 사회적 맥락 안에서
수없이 꺾이고 깎인다.
라즐로는 바로 그 ‘깎여 나가는 과정’을,
브루탈리즘이라는 양식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가 설계하는 콘크리트 건물은
차갑고 거칠고 무겁다.
하지만 그 벽면 안에는
그가 겪은 전쟁의 공허, 이주민으로서의 불안정성,
그리고 사랑에 대한 침묵이 조용히 박혀 있다.
이것이 바로 브루탈리즘의 정수다.
장식을 없애고, 구조를 드러내며,
소재 자체가 공간의 감정을 대변하는 방식.
라즐로는 건축을 통해 ‘표현’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노출 콘크리트’ 자체가 그의 언어가 된다.
건축가들은 종종 어떤 재료에 자신을 이입한다.
누군가는 나무처럼 유연하고 따뜻한 구조를 추구하고,
또 누군가는 유리처럼 투명하고 경계 없는 공간을 꿈꾼다.
그에 비해 브루탈리스트들은
콘크리트의 묵직함을 감정의 질감으로 쓴다.
이 영화는 그것을 아름답게 구현해냈다.
라즐로가 설계한 건물은 모두
완전한 직선과 비례, 기하학적 질서 속에 담긴 불완전한 감정으로 구성된다.
조형적으로는 규칙적이지만,
그 안의 분위기는 무겁고 긴장감 있다.
브루탈리즘이 단순히 콘크리트 건축이 아니라,
‘감정적 무표정’ 속에 시대의 진실을 담으려는 시도임을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건축가 입장에서 보면, 라즐로의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부응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결과물들이다.
그래서 그 건축물들은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다.
사람들은 그의 건축을 “차갑다”, “공포스럽다”고 말하지만,
정작 라즐로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보호하고 있었다.
《브루탈리스트》는 미묘하게도
‘한 명의 천재 건축가’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라즐로는 완성된 이상을 현실에 구현해내는 영웅이라기보다,
계속 흔들리고, 타협하고, 때로는 자기 생각을 지우기까지 한다.
특히 그가 미국 정부의 공공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계획과 정치, 시대적 가치관의 틈에 놓이게 되는 장면은
건축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현실이다.
건축은 ‘예술’과 ‘공공’ 사이에 놓여 있다.
영화는 라즐로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다 결국
시스템에 흡수되는 순간을 그리며,
우리가 종종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건축가로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스스로 묻게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구조 자체가
라즐로의 아내 에디스의 시점에서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즉, 건축가는 말을 하지 않고,
그의 건축을 옆에서 바라본 타인의 시선이 라즐로를 설명한다.
이는 건축이라는 작업이 얼마나 침묵 속에서 진행되는지,
그리고 완공된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건축을 기능과 공간으로만 본다.
하지만 건축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신념, 두려움, 사랑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하나의 ‘구체적 감정’이다.
에디스가 그 건축물 안에서 기억하는 라즐로는
엄격하지만 따뜻했고, 냉정하지만 고독했다.
그의 건축도 마찬가지다.
브루탈리즘이라는 방식은
자기 고백이나 설명 없이도
자신의 감정을 깊이 있게 남기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브루탈리스트》는 건축가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그가 만든 ‘건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건축가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건축이란 결국 자신의 언어를 사회 속에 밀어넣는 작업이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 언어는 때로 거부당하고, 때로 무시되며,
어쩌면 수십 년 후에야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건축가가 만든 콘크리트는 남는다.
그 위에는 시간과 사회, 사용자의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결국, 건축은 기억을 위한 구조다.
그리고 브루탈리즘은 그 기억을 꾸미지 않고,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브루탈리즘을
"차가운 건축", "사회주의적 감성", "비인간적인 질감"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브루탈리스트》를 보고 나면
그 ‘차가움’은 오히려 감정을 감추지 않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된다.
건축가로서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마다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 시대의 기억, 그리고 자신의 흔적을
어떻게 새기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브루탈리스트》는 감정을 ‘건물’로 바꾼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침묵을 언어로 만들고 싶은
모든 건축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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