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존 서바이벌이 아니라, 건축적 권력 게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한국의 전통 어린이 놀이를 바탕으로 한 생존 게임을 통해, 경쟁과 계급, 인간 본성을 그려낸 작품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딱지치기, 줄다리기 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게임들이 잔혹한 현실의 장치로 재해석되며 독창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단순한 생존 경쟁 드라마가 아니다.
이 시리즈는 각 시즌마다 수백 명의 참가자가 모여 목숨을 건 게임을 수행하며, 그 안에서 돈과 인간성, 사회 구조를 해부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방식이 흥미롭다. 참가자는 항상 감시당하는 위치에 놓여 있으며, 진행자는 관찰자이자 통제자 역할을 한다.
이러한 위계 구조는 스토리 속 인물 설정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건축적으로 설계된 감시의 시선’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가자와 진행자의 관계는 공간, 동선, 복장, 색상, 높낮이, 구조물의 개방성과 폐쇄성 등 건축적 요소들로 체계적으로 시각화되어 있다.
즉, 《오징어 게임》은 공간을 통해 권력과 지배, 감시와 불안을 설계한 이야기다.
2. 참가자는 갇히고, 주최자는 본다 – 판옵티콘적 구조의 시각화
《오징어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게임에 참여하는 순간부터 철저히 ‘피감시자’로 전락한다.
복장은 번호가 매겨진 초록색 운동복으로 동일화되고, 이름은 사라지며 숫자만 남는다.
이는 주체성과 개별성의 상실, 즉 감시 대상이 되었다는 설정의 첫 시각적 상징이다.
이들을 수용한 공간은 감옥보다 조금 나은 침대식 집단수면 공간이다.
수십 개의 2층 침대가 층층이 쌓인 채 격자처럼 정렬돼 있으며,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은 층고는 인간의 왜소함을 강조한다.
감시는 보이지 않지만, 언제든 지켜볼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감시탑 구조처럼 작동한다.
이 구조는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감시체계, 즉 ‘판옵티콘(Panopticon)’과 유사하다.
감시자는 중앙에서 둘러보며 모든 피감시자를 볼 수 있지만, 피감시자는 감시자가 어디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유현준 교수 역시 유튜브 콘텐츠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그는 "참가자들은 시종일관 감시받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도록 구조적으로 설계된 공간에 배치된다"고 설명하며,
"높은 천장, 고정된 카메라 시점,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폐쇄성은 건축적으로 불안과 복종을 유도하는 방식"이라고 해석했다.
3. 색, 동선, 층위 – 권력은 수직으로 설계된다
《오징어 게임》 속 건축은 ‘권력의 위계’를 수직적으로 시각화한다.
주최자와 관리자들은 항상 높은 위치에서 참가자들을 내려다본다.
게임이 진행되는 운동장 구조에서도, 관전석은 언제나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참가자들은 아래에 배치된다.
색채 또한 역할에 따라 구분된다.
참가자는 초록색, 진행자는 분홍색, 주최자는 검정색 복장을 입고,
복면을 써서 표정을 감춘다. 이는 인간의 감정을 삭제하고, 역할만 남긴 사회 구조의 시각화다.
이런 복장 설정은 감시받는 자와 감시하는 자 사이의 구분을 더 명확히 만들어 준다.
동선에서도 위계는 드러난다.
계단실은 기하학적이고 환각적이며, 미로처럼 얽혀 있다.
이는 참가자가 항상 혼란 속에서 움직이도록 설계된 비논리적 동선이다.
반면 주최자 공간은 대칭적이고 안정된 구조로 되어 있어 질서와 통제의 감각을 부여한다.
즉, 《오징어 게임》의 모든 공간은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규정하며,
이것은 대사보다 강력하게 권력 구조를 시청자에게 각인시킨다.
4. 외부는 단절되고, 내부는 개별화된다 – 자유의 부재를 건축으로 설계하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에서 외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문은 없고, 자연광도 없다. 모든 조명은 인공이며, 자연은 디지털 세트로 대체된다.
참가자는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채, 건축적으로 고립된 사회 안에 갇혀 있는 상태가 된다.
이는 곧 자유의 부재, 그리고 사회라는 이름의 통제 시스템 안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반대로 내부는 기묘하게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전통 놀이(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등)는 거대한 세트장 형태로 구현되며,
현실보다 더 과장된 스케일과 불균형한 공간감을 통해 불안과 긴장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절벽을 재현한 유리다리 게임은 고소공포를 유도하는 동시에 높이에 따른 공포와 권력의 차이를 감각화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향해 설계된다.
바로 참가자가 ‘게임의 룰을 절대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구조’이다.
공간은 탈출이 불가능하며, 감시는 계속되고, 선택지는 구조적으로 없다.
이러한 설계는 자발적 복종과 무력감을 건축적으로 형상화한 결과다.
5. 현대 사회의 축소판, 《오징어 게임》은 공간으로 말한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이유는 단지 잔인함이나 반전 때문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화된 사회를 건축적으로 상징한 ‘설계된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간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으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된다.
참가자는 언제나 보이는 자이며, 진행자는 보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아는 자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의 권력 구조, 회사 조직, SNS 문화, 계층화된 시스템과 닮아 있다.
결국 《오징어 게임》은 인간을 둘러싼 공간이 어떻게 그들의 행동과 심리를 지배하는가를 가장 시각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며,
그 건축적 설계가 드라마의 긴장감과 몰입도를 실질적으로 이끌어낸 핵심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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