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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숲, 왜 계단으로 가득 찬 공간일까? 책이 흐르고 사람이 머무는 계단형 서재의 건축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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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entko2531 2025. 7. 2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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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장을 넘어서는 공간이 탄생하다

파주 출판단지의 대표 공간, ‘지혜의 숲’을 처음 마주한 사람은 누구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이렇게 많은 계단이 있는 걸까?” 책이 가득한 이 건물은 전통적인 도서관이나 서점과는 다른, 독특한 공간 감각을 품고 있다. 사방을 감싸는 책장 사이로 계단이 오르고, 사람들은 그 계단에 앉아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멈춘다. 단순한 통로가 아닌 ‘계단’이 이 공간의 중심이다.

이런 낯선 구조는 단순한 인테리어 장치가 아니다. 이 공간은 ‘정보의 저장소’가 아니라 ‘지식이 흐르는 공간’을 목표로 설계되었다. 누구나 오르내릴 수 있고, 누구나 그 중간에 멈춰 책을 펼 수 있는, 계단이라는 매개체가 공간과 사람 사이를 유연하게 연결한다. 누군가는 이 구조를 ‘책으로 이루어진 협곡’이라 표현하고, 또 다른 이는 ‘지식이 흘러내리는 폭포’ 같다고 말한다.

‘지혜의 숲’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서재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계단’이라는 장치가 놓여 있다.

지혜의 숲 도서관 이미지


2. 계단은 왜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가?

계단은 건축에서 가장 오래된 장치 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계단은 ‘위아래를 연결하는 통로’로만 기능해왔다. 지혜의 숲에서의 계단은 다르다. 이곳에서 계단은 ‘체류를 위한 수단’이며, ‘시선을 위한 무대’이고, ‘사회적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다.

유현준 교수는 자신의 영상에서 이 공간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계단이란 사람의 동선을 수직적으로 바꾸는 동시에, 그 자체로 자리를 제공하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사람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동시에, 멈춤을 유도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책장 사이에 놓인 계단에 앉아 책을 꺼내 읽고, 생각에 잠기며, 때론 서로 대화를 나눈다. 테이블이나 의자처럼 ‘정형화된 자리’가 아닌 계단은, 사람마다 다른 자세와 행위를 허용하는 자유로운 구조물이 된다.

이는 현대 건축의 새로운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하나의 공간이 ‘한 가지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다기능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흐름이다. 지혜의 숲의 계단은 그 흐름을 가장 건축적으로 잘 실현한 사례 중 하나다.


3. 기존 도서관과 어떻게 다를까?

우리가 익숙한 도서관은 대체로 ‘조용하고 질서정연하며 기능적인 공간’이다. 책이 줄지어 정리돼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조용히 읽는다. 이 구조는 학문 중심, 정보 집중형 시스템에 최적화되어 있다.

하지만 지혜의 숲은 이와 전혀 다른 접근을 한다. 이 공간은 ‘지식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식이 흐르는 곳’이다. 사람의 시선은 단절되지 않고, 계단과 책장, 천창과 구조물 사이를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천장의 자연광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며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고, 책장은 벽체가 아니라 경계 없는 풍경이 된다.

한마디로, 지혜의 숲은 건축적으로 “읽는 공간에서, 흐르는 공간으로의 진화”를 보여준다. 독서라는 행위가 사적이고 고립된 활동이 아니라, 주변과 연결되고 공유되는 사회적 행위로 확장된다. 이 변화는 책과 공간,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4. 사람들은 왜 계단에 앉고 싶어할까?

카페에서도, 서점에서도, 강의실에서도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계단에 앉고 싶어한다. 계단은 의자보다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 ‘자유도’가 훨씬 크다. 등을 기대지 않아도 되고, 다리를 접는 자세도 제한이 없다.

또한 계단은 높은 곳에서 전체 공간을 조망할 수 있게 해주며,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이도록’ 만드는 무대 역할도 한다. 이중적 위치는 ‘관찰자이자 참여자’라는 독특한 감각을 제공한다.

지혜의 숲의 계단은 단지 오르내리는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건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사람이 공간과 ‘관계를 맺는 접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자가 아닌 계단에 앉기를 선택하고, 책을 펼치고, 대화를 나누고, 셔터를 누른다. 이 모든 행위가 자연스럽고, 심지어 의도된 듯 조화롭다.


5. 왜 우리는 이런 공간에 끌리는가?

지혜의 숲은 단순히 ‘책 많은 곳’이 아니다. 이곳은 건축적으로 설계된 감정의 흐름을 갖춘 공간이다. 책장은 풍경이 되고, 계단은 관계가 되고, 사람의 움직임은 동선이 아니라 리듬이 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앉을 수 있는 곳, 기대어 볼 수 있는 곳, 숨을 수 있는 틈을 좋아한다. 지혜의 숲은 그 모든 욕망을 ‘계단’이라는 장치를 통해 실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건축 기술의 성취가 아니라, 공간이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디자인할 수 있다는 증거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다. 이곳에서 디자인은 사람이 어떻게 책과 만나고, 공간과 교감하고, 머무르며 생각하는지를 구조로 표현하는 언어다.


6. 마치며 – 계단 위에 쌓인 ‘지혜’

지혜의 숲은 한국의 책 문화, 공간 감각, 건축적 상상력이 만나는 가장 밀도 높은 장소 중 하나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머물고, 사진을 찍고, 책을 꺼내고, 그 자리에서 바로 펴보는 모든 순간이 ‘계단’ 위에서 이루어진다.

건축은 결국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고, 멈추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파주 지혜의 숲은 계단이라는 구조를 통해 그 일을 해낸다.

책은 가만히 있지만, 공간은 사람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새로운 기억이,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 지혜는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계단에 앉아 펼쳐본 사람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