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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가 사라진 집들 – 일상에서 작별한 작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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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entko2531 2025. 7. 15.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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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란다가 사라지고 있다 – 아무도 말하지 않은 풍경의 소멸

한때, 베란다는 집 안에서 ‘가장 외부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빨래가 마르던 곳, 화분이 자라던 곳, 아이가 자전거를 연습하던 곳.
그 공간은 작고 얇았지만, 집 전체에서 가장 감각적인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 신축 아파트에는 베란다가 거의 없다.
새로 지어지는 집은 대부분 ‘확장형’ 구조로,
거실과 방의 끝이 곧 외벽이며, 유리창 너머엔 난간만이 있다.
베란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베란다가 사라진 것은 단순한 평면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집이 감정과 여유를 비워내는 방식이며,
일상이 가진 감각의 레이어가 하나 줄어드는 구조이기도 하다.

베란다 사진


2. 확장이라는 이름의 공간 삭제

‘확장형 아파트’라는 개념은 2000년대 이후 점차 보편화되었다.
전에는 평형 대비 실사용 면적이 좁았고,
분양가 대비 체감 공간이 작다는 소비자의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건설사와 개발사는 베란다를 허물고 외벽을 바깥으로 밀었다.
거실이 넓어지고, 방이 커졌으며, “서비스 면적”이 주거 면적으로 편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같은 평수라도 넓은 집을 얻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그 ‘확장’은 사실상 ‘소멸’에 가까웠다.
베란다는 공간으로서도, 장면으로서도 지워졌고,
일상에서 ‘경계’를 경험하던 감각이 하나 사라졌다.


3. 베란다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감정적 완충지대’였다

건축에서 베란다는 단순한 외부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완충 공간(Intermediate Space)’으로 분류되는 독특한 구조다.
완충 공간은 내부와 외부를 바로 연결하지 않고,
그 사이에 하나의 감각적 층위를 두어
사람이 자연스럽게 안과 밖을 오갈 수 있게 만든다.

이 완충이 주는 심리적 효과는 작지만 크다.
예를 들어 베란다에 나가면
공기가 조금 더 차고, 햇살이 직접 닿고,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이 미세한 변화가 사람의 감각을 전환시키고,
집 안에만 머무르던 폐쇄성을 깨는 자극을 제공한다.

또한 베란다는 기능을 넘어선 ‘소소한 자유의 공간’이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화분을 키우고,
탁자 하나 두고 커피를 마시며,
비 오는 날엔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장소.
이 모든 순간은 실내와 실외 사이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4. 베란다의 상실은 감각의 평면화다

확장형 구조는 공간을 넓혔지만,
동시에 집의 감각 구조를 단순화시켰다.
이제 집에는 ‘거실 → 창문’으로 직선적 구조만 남았다.
사람은 더 이상 공간의 층위나 변화를 느끼기 어렵고,
모든 공간은 에어컨, 로봇청소기, 스마트 홈으로 평준화된다.

하지만 문제는 공간이 평면화되면
사람의 감각도 무뎌진다는 점이다.
베란다는 공간의 숨구멍이자, 감정의 통풍구였다.
그 숨구멍이 사라진 집에서
사람은 감각을 잃고, 감정을 잊는다.


5. 왜 우리는 베란다의 부재를 인식하지 못했을까?

사실 베란다는 기능적으로도 ‘애매한 공간’이었다.
냉난방이 되지 않고, 계절에 따라 불편하며,
관리비는 들지만 뚜렷한 용도가 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또한 주거 시장의 상품화가 가속화되면서
‘평수 대비 실면적 확보’가 소비자의 우선 과제가 되었고,
건설사는 그에 맞춰 베란다를 없애는 설계를 도입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른 채
조금 더 넓은 거실과 방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햇살이 부드럽게 퍼지던 오후의 공간,
바람이 지나가던 틈,
그리고 작지만 개인적인 여백을 잃었다.


6. 베란다는 사라졌지만, 그 감각은 필요하다

물론 모든 베란다가 복원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도시 구조가 바뀌었고, 주거 패턴도 달라졌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람에게는 여전히 ‘중간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꼭 베란다가 아니더라도
반투명한 파티션, 작은 틈새 테라스,
햇살이 머무는 가벽 뒤의 공간처럼
완전히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감각의 여지를 가진 구조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공간이 있어야만
사람은 거주 공간 안에서 감정을 바꾸고,
일상에서 작은 휴식을 느낄 수 있다.
베란다가 했던 그 역할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라도 복원되어야 한다.


마치며 – 공간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풍경이 줄어든 것이다

베란다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집 안에 있던
작고 조용한 풍경의 틈이었다.

그 틈에서 우리는
햇빛을 읽고, 바람을 느끼고,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출 수 있었다.

확장형 평면은 집을 넓혔지만,
그 집에서 ‘멈추는 감정’은 줄었다.

앞으로의 주거가 더 인간적이 되려면,
단순히 평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감각과 감정을 설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다시, 베란다 같은 틈을 원하고 있는가?”가 될 것이다.